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문단 편집) == 기타 == * 할힌골 전투에 관해 다룬 서적 중 잘 알려진 것으론 앨빈 쿡스(Alvin Coox)의 [[https://www.amazon.com/Nomonhan-Japan-Against-Russia-1939/dp/0804718350|Nomonhan: Japan Against Russia, 1939]],[* 1276쪽에 달하는 압박적인 분량으로 이후 할힌골 전투 연구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후자 서적에서도 해당 서적을 언급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스튜어트 D. 골드먼(Stuart D. Goldman)의 [[https://www.amazon.com/Nomonhan-1939-Armys-Victory-Shaped/dp/159114339X|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가 있다. 해당 서적은 일본의 의도적인 은폐로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할힌골 전투가 세계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높게 평가하는데, 전자는 "세계사의 전환점"이라 서술했으며,[*한석정,2009,3 출처: 한석정, 러일-만몽-몽몽의 대결 - 노몬한(할힌 골) 전투 70주년 기념 학회 참관기, 만주연구, 2009.12, p.3] 후자는 아예 제목부터가 "2차 대전을 결정한 붉은 군대의 승리(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다. 할힌골 전투로 인해 소련은 극동에서 날뛰던 관동군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고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 대전]]을 개전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만약 이때 소련이 관동군을 이기지 못했다면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시 일본이 호응해 소련은 [[양면전쟁]] 상태에 놓이고 결국 패전해 [[냉전]] 체제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몽골]] 여행[* 참고로 이 여행을 후원한 주체가 1990년대 초반 존재했던 일본 [[극우]]지 [[마르코 폴로(동음이의어)|마르코 폴로]]였다. 이 잡지는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죄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했는데 나중에는 [[홀로코스트]] 같은 [[유대인]] 학살이 완전 조작이라고 역사왜곡을 행하다가 미국 내 유대인 단체의 분노 어린 경고에 겁먹고 폐간되었다. 극우를 무작정 싫어하지 않으나 [[무정부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 잡지가 돈 대줘서 몽골 여행하고 돌아와서 극우를 까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중 할힌골 전투 승전비를 보고 일본에서는 애써 별 것도 아닌 사건[* 놀랍게도 새역모에서 낸 교과서에서는 이 전투가 일본이 승리한 전투라면서도 여전히 노몬한 '사건'으로 쓰고 있다. 이겼다면서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며 축소하는 꼴이다.]으로 축소하고 외면하지만, 세계적으로는 규모가 큰 전투로 알아준다면서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쓴 소설 '[[태엽 감는 새]]'에서 이것을 과거 이야기로 다루었는데 할힌골 전투를 사건으로 격하하는 것을 두고 패배를 감추는 미련한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몇몇 극우들이 불쾌하게 여겼는지 심지어 살해 협박 전화까지 걸었다. 이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는 끝까지 미련하다면서 더 극우들을 씹었다. *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군 주력 전차이던 [[치로]]는 대전차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차가 아니었다.[* [[치하]]도 마찬가지이나, 당시 치하는 할힌골에 4대 밖에 없었으므로 논외.] 이 전차의 주포인 57mm 곡사포는 [[대전차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관통력 자체는 보병포답게 극악이었으나, 종이 장갑으로 악명높은 [[BT 전차]]나 [[T-26]]을 표준 교전 거리보다 약간 안쪽인 500m 내외에서 격파하는 데 딱히 문제는 없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제대로 맞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탄의 산포도가 넓은 단포신포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89식 중전차는 소련군의 BT 전차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비해 처음부터 대전차전을 염두에 둔 탓에 37mm 대전차포를 주포로 탑재한 95식 경전차 [[하고]]는 비교적 수월하게 [[BT]] 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전차 개발 사상에서 경전차는 영국의 [[순항전차]]나 소련의 기병전차(예를 들어 BT 전차)와 마찬가지로 적 기갑 부대와의 교전 및 신속한 추격전을 염두에 둔 다목적 전차였다.] 물론 일본군의 37mm 대전차포는 동급 대전차포 중 최악의 대전차 능력을 자랑해서 BT 전차의 45mm 주포보다 사정거리가 짧고 위력도 심하게 부족하긴 했지만, BT 전차도 종이 장갑이고 철판의 재질도 안 좋아서 95식 경전차의 포탄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일본군 전차인 89식이나 97식이 BT 전차보다 방어력이 좋았고 방어력이 매우 낮은 95식 경전차조차 BT 전차와 대등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당시 소련군 전차병의 숙련도보다 일본군 전차병의 숙련도가 더 높았던 점도 호재로 작용해 95식 경전차는 의외의 성과를 올렸다. 물론 95식 경전차도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려면 500m 이내로 급속 접근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형세를 뒤집을 결과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관광당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관동군은 전차 손실을 보충해 계속 싸워 보자는 생각은 안하고 전차 부대를 그냥 전선에서 빼 버렸고, 결국 제대로 된 대전차포도 없는 일본군 보병들은 소련군에게 갈려 할힌골의 [[비료|거름]]이 되어버렸다. * 전차들이 철수하자 대전차포가 부족했던 일본군은 몰려오는 소련군 전차를 [[알보병]]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 전차들의 피해는 일본군 [[참호]]들을 돌파하면서 늘어났는데, 참호에 [[사각지대]]가 많다보니 그것을 노린 일본군의 대전차포나 [[화염병]] 투척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소련군 전차 부대가 보병들과 원활히 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들의 피해가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것만으로는 전차 부대의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 소련군의 인명피해도 적지 않았다. 원래부터 소련군은 제정 러시아군 시절부터 인명피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던데다가 당시 소련군도 전차를 대규모로 투입한 전술을 실전에서 시행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작전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여기에 [[바르바로사 작전]] 항목에도 기술되었지만, 전차부대가 [[스페인 내전]] 이후 계속 해체와 재편성을 거듭했기 때문에 많은 전차 부대들이 보병 원호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대규모 전차 작전에 긴급 투입되어서 운용도 세련되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 방면에 있던 전력을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인 [[몽골]]까지 급속하게 이동하여 적의 공격을 사전 격멸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여 [[관동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한편 일본 [[극우]]들은 사상자 수 차이 및 어정쩡하게 맺어진 종전조약과 후에 체결된 중립조약을 근거로 '대등하게 싸운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그런 식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가 되며 [[제1차 세계 대전]]이나 [[러일전쟁]]도 무승부다.[* 참고로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할힌골 전투 사망자는 2만 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수천 명에 불과한 당시 발표와는 몇 배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는 살아있는 사람도 안치되는 등 자료로 참고하기에는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 즉, 이것으로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 자료에 나온 수치에 대해 할힌골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들이 사망 후에 안치된 것이라 늙어서 자연사한 사람이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있다([[http://www7a.biglobe.ne.jp/~mhvpip/Nomonhan.html|참조]]).] * 소련군 최고 지휘관들은 전투 후 공로로 각종 포상을 받았지만, 고급지휘관 몇몇은 후에 [[베리야]]가 지휘하던 [[NKVD]]의 의심을 사서 체포 후 처형되었다. 극동군 참모장으로 승리에 큰 공을 세운 그리고리 시테른은 전투 종료 후 주코프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겨울전쟁]] 때는 제8[[야전군사령관]]을, 그 이후에는 주코프의 후임으로 극동군사령관을 역임했지만, [[독소전쟁]] 개전직전 1941년 6월 [[레프 트로츠키]] 추종자이자 [[나치 독일]]의 스파이라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이는 시테른이 트로츠키와 똑같은 독일계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파견되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바 있는 공군 베테랑 장교였던 야코프 스무시케비치(Яков Владимирович Смушкевич / Jakovas Smuškevičius, 리투아니아어 표기)도 이 전투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해 주코프의 조공을 맡은 공로로 두 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고 소련 공군 총사령관과 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을 역임했지만, 역시 1941년 6월에 날조 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라브렌티 베리야]]는 주코프도 똑같이 없애려고 했지만, 주코프는 시테른이나 스무시케비치처럼 당시 스탈린이 경원시했던 [[유대인]]이 아니었고 이 전투 이전부터 군부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인물이라 결국 숙청 대상자 목록에서 제외했다. * 일본군 제23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원인 중에는 일본군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 일본군에서는 후퇴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소련군의 포위망이 조여오는 와중에도 제23사단의 장교들은 후퇴하자는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 행태는 [[과달카날 전투]]와 [[임팔 작전]]을 비롯한 전쟁 과정은 물론 [[포츠담 선언#s-4|포츠담선언]]에 이르는 종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태평양 전쟁 내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반복되었다.]] 사실 당시 일본이 수십 년간 쌓아올린 군사전통은 '용감하게 돌격하면 이김' '겁먹고 물러나면 짐' 의 반복이기도 했다. 유럽은 1차대전기의 참호전을 겪으며 '수백만이 돌격하면 수백만이 그대로 시체가 될 뿐'이라는 경험을 했지만, 일본은 '수백 명 죽고 나서 이김'이라는 경험을 했다. 뤼순 요새에서는 몇 개 사단이 갈려나갔지만, 수십 년 동안 고작 뤼순 1번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그럭저럭 제식 소총 든 보병이 포병지원 받으며 돌격하면 이기다보니... 결국 3류 적군만 때려잡던 2류 군대는 (다른 요소는 다 우위니) 정신력만 잡고 돌격하면 이겼지만, 1류 군대(특히 미군) 상대로는 돌격하는 족족 갈려나가게 되었다. * 스탈린은 승리 후 주코프를 불러들여 일본군이 어떠한가에 대해 물었고 주코프는 "사병과 [[부사관]]들은 용감하고, 초급 장교들은 완강하지만, 고급 장교들은 무능하다."고 평가했다. 마치 [[에르빈 롬멜]]이 [[이탈리아 왕국군]]을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다."라고 평가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소관의 작전 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 정신의 부재로 패전."'''이라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결국 아랫선들이 줄줄이 [[할복]]하거나 도망쳐서 [[마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일부 일본군 포로들은 이것 때문에 송환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 [[야스히토|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대좌[* 천황 [[히로히토]]의 동생이었다.]가 이 전투에 있었는데 고마츠바라 미치타로와 [[츠지 마사노부]]의 대화가 가관이다. >야스히토 대좌: 이 전투 말일세. 경들은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미치타로 중장: '''물론입니다. 전하. 우리 황군이 전쟁에서 진 경우를 봤습니까?''' >마사노부 중좌: '''전하. 원래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옵니다.'''[* 비록 츠지와 야스히토가 [[사관학교]] 동기이자 [[육군대학교]] 동기였지만 야스히토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이라 존대를 했다. 미치타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 말을 들은 야스히토가 기가 막힌 듯 쳐다보고는 한마디 했다. > >야스히토 대좌: 그런가? 그러면 한 가지만 묻겠네. '''만약 경들 빼고 장교와 부사관과 병들 포함해서 전원 전사했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나? 마사노부 중좌가 한 말 그대로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진 것이니 두 사람만 남아도 이긴 것인가? 적군은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네.''' > >그 말을 들은 츠지 중좌와 미치타로 중장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무타구치 렌야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br]어느 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대위가 15군 사령부에 시찰을 왔다.[br]다카히토 대위: 무타구치 공의 부대는 보급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br]무타구치 중장: 전하, 보급이 뭐 걱정 있겠습니까?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입니다.[br]다카히토 대위: (황당한 듯) 그런가? 그래, 다 말이 된다고 하겠네만... 만약 적군도 같은 생각이면 어쩌려는가?[br]이렇게 말하자 무타구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장군과 [[육군대학교]] 실질적 수석[* 야스히토가 사관학교, 육군대학 수석이었고 차석은 칸인노미야 하루히토였다.]이었던 장교가 명목상 수석[* 야스히토는 이 전투가 첫 전투였다. 게다가 더 심각한 건 이 사람은 실전도 치러본 적이 없이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장까지 달았던, 사실상 이름만 군인이었을 뿐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실제 군인들보다도 전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이었던 일개 황족보다 생각이 짧았다. * 일본군 제23사단의 피해는 막심하여 참모장 이하 연대장급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생존한 고급 지휘관과 참모들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였다. 제23사단장 고마츠바라는 예편된 지 얼마 안 되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적지 않은 문헌에서 고마츠바라가 자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 전멸을 당한 제23사단을 제외하고 인접 부대와 상급 부대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서 제대로 책임을 진 자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책임 추궁을 당하기는커녕 2차 대전에 멀쩡하게 참전하였다. 모든 책임은 제23사단이 뒤집어 쓴 셈이다. *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으로 병력과 물자의 보급이 중국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최고 정예인 관동군조차 정예부대는 중일전쟁에 투입되고 전차나 항공기를 포함한 군수 물자 또한 상당량이 중국 전선에 투입 중이었다. 한마디로 [[양면전쟁]]이었다. 반면 소련은 당시 일본 상대로만 전투 중이었다. * 러시아 군가 중 [[세 전차병]]은 할힌골 전투에 참가한 BT 전차와 [[전차 승무원]]들에 대한 노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